자아를 내어 주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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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2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한 아이가 시험에서 95점을 받았는데도 울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다른 아이들도 90점 이상의 성적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엄마한테 혼날 거예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벌써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이 아이들은 충분히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에 집중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물에서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성적과 실수를 통해 자신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 평가 기준은 스스로가 아닌 부모의 기대와 사회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실수하지 않기 위한 선택을 하고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어릴 적 그런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생 기숙사 사감을 하던 시절도 더불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아이들에게 유독 엄하게 대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싫어하던 내 모습을 그들에게서 본 탓일까? 그때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두려워하던 나의 모습을. 왜 그랬을까? 왜 그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자극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이유를 조금씩 깨달았다. 그 아이들은 나의 감춰진 두려움과 결점들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들에게 강하게 반응한 것은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그 이후로 나는 생각했다. 왜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집착할까? 왜 실수 하나로 자아가 무너지고 자아의 일부가 된 듯한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할까? 자아를 지키려는 이 집착이 결국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나는 두려움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그 자아를 지키기 위해 또다시 두려움을 키워 가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자아를 찾아내고 형성하기 위해 나는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을 방황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자라며 오랫동안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능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야 했고 사회에서는 인정받아야 했다.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때마다 자아가 흔들렸다. 나는 내 쓸모를 자아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쓸모를 잃게 되면 나 자신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결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이 나를 옥죄었다. 성적, 성과, 평가 이 모든 것이 내 자아의 가치 척도가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진정한 나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변화시킨 건 일본에서의 생활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서 쌓아 온 것들이 여기에선 별 의미가 없었다. 내 자아를 형성하던 모든 것과 떨어져 나를 억누르고 숨겨 왔던 자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쓸모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자아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국에서의 나와 일본에서의 나는 분명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서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 온 지 벌써 16년이 지났다. 일본에서 살며 느낀 점 중 하나는 많은 일본인이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감춘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지내는 방식으로 자아를 보호하는 듯 보였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자아를 지키기 위한 강한 방어 기제가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솔직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지만 그 또한 자아를 지키려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자아를 어떻게 표현하든 결국 사람들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자아를 지키려는 노력과 함께 참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오히려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아를 지키고 발견하려는 그 노력 자체가 결국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모두 ‘나’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요즘 정말 성숙한 자아란 어떤 모습일까를 자주 생각한다. 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아마도 자신을 고수하는 대신 타인을 위해 자아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의 쓸모에 집착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과 행복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자아를 내어 줄 때 자아는 더 확고해지고 마음은 평온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자아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살면서 나는 자아를 지키려는 이 두려움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하는지 체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내가 타인을 위해 자아를 내어 줄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온전한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다. 너희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희 자신을 네 옆의 친구에게 내어 주어 보라고 격려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자아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때로는 자아를 내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숙한 자아란 자아의 고집스러운 보호가 아닌 자아의 유연한 나눔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자아를 지키려 애쓰는 대신 타인을 위해 자아를 내어 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묻고 싶다. 여러분은 어떤 자아를 추구하고 있는가? 자신의 쓸모에 집착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내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가?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성숙과 행복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 라명훈 일본 삿포로 소학교 채플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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